지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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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0-24 06:45
이승만 박사에 관한 자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815  

호는 우남()이며 초명은 승룡()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1875년 출생하였다. 선비이신 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1952년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