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덕사
 
 
 
 
 
현재위치 : 홈 > 지덕사료 > 전례요람

 
작성일 : 08-11-01 17:01
장례 [葬禮]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49  

상례(喪禮)의 한 부분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일. 일반적으로는 장사(葬事)를 치른다고 하여 상례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례가 시신을 다루어 처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처리하는 과정, 죽은 사람과 관계가 있었던 살아 있는 사람이 시신의 처리과정 전후에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규정 등을 하나의 연속된 절차로 정리한 것을 의미한다면, 장례는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만을 뜻한다.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은 크게 보아 시신을 땅 위에 버리는 방법, 땅 속에 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방법, 불에 태우는 방법, 물 속에 버리는 방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것들을 각각 풍장(風葬)·매장(埋葬)·화장(火葬)·수장(水葬)이라고 불러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시신 처리방법은 그 사회의 관습에 따라 다르기도 하나, 특히 종교에 따라 서로 각각 다르게 규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물체로서의 인간은 어느 사회에서나 한 번은 죽어야 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시신을 처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마다 제각기 다른 생활관·내세관·영혼관·육체관에 의하여 시신에 대한 관념을 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례는 그 사회의 관습이나 종교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관습적이든 종교적이든 어떤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을 장례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장례법〕

우리 나라의 경우 현재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시신처리방법은 매장과 화장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장례식은 역사적으로도 그대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매장이 화장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은 고고학 발굴자료를 통하여 우선 증명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매장방법은 여러 시대마다 제각기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지표의 매장법은 재래의 것과 유교식 장례의 혼합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화장은 불교의 도입과 더불어 4, 5세기경부터 우리 나라에서 행하여졌을 가능성이 있으나, 지금의 화장법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묘지화장장매장급화장취체규칙 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에 의하여 서울을 비롯한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설치된 일본식 화장장을 계기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불교식 화장법은 다비(茶毗)라고 하여 아직까지 승려들의 시신처리방법으로 남아 있으나, 일반 신도들은 주로 유교식 매장이나 근대식 화장을 통한 장례를 치르고 있다.

이것은 곧 시신처리에 대한 관념이 시대적 조건이나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변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장례절차보다는 장례유적, 곧 분묘양식이나 분묘의 구조변천을 통하여 각 시대 고유의 장례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다.

〔장례의 유래 및 종류〕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매장법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까지 신석기시대의 분묘라고 확인된 춘천 교외의 적석묘(積石墓)는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이다.

그 크기로 보아 다른 지방의 똑같은 적석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신의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사지를 쭉 펴서 누였던 것〔東枕伸展仰臥〕으로 보이며, 부장품으로 돌도끼나 돌화살촉 그리고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으나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 영혼불멸사상이나 어떤 뚜렷한 내세관에 의하여 장례를 치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 밖에 토장묘(土葬墓)라고 불리는 것도 두만강가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신은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동침신전앙와장법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 다음 청동기시대의 매장법은 지석묘와 석관묘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지석묘는 지상에 탁자형으로 지은 북방식과, 지상에 괴석(塊石)만 놓여 있는 남방식의 두 가지가 있다.

북방식 지석묘는 북한에서는 철기가 들어오기 전 늦어도 3세기 이전에 소멸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에 퍼져 내려가면서 남방식 지석묘의 형식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부장품으로는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발견된다.

남방식 지석묘의 형태는 매장부분을 돌 또는 목판으로 뚜껑을 덮은 다음 적석(積石)을 하고, 지상에 큰 반석을 얹거나 지상의 큰 판석 자체를 뚜껑으로 삼은 것으로 구분된다. 부장품은 주로 마제석검과 돌화살촉이며, 때로는 홍도(紅陶)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북방식이든 남방식이든 지석묘의 매장부분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너무 작아서 굴장(屈葬:손발을 굽혀 체위를 쭈그린 자세로 매장하는 일) 아니면 이차장(二次葬)이 실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추측은 실제로 무릎을 꿇린 채 옆으로 뉘어 있는〔側臥屈身葬〕 인골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굴장하기에도 작은 크기의 것이 너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세골장(洗骨葬:시체의 연부를 제거한 뒤 뼈를 깨끗이 씻어 매장하는 일)과 같은 특수한 장례가 행하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시대 매장법의 또다른 하나인 석관묘의 부장품으로 마제석검과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고 있다. 크기에 있어서도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차이가 심하여 모두 신전장(伸展葬)·굴장·세골장 등을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한쪽이 넓고 다른 쪽이 좁게 되어 있는 석관묘의 구조는 시베리아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청동기 문화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기시대의 매장법은 토광묘(土壙墓)와 옹관묘(甕棺墓)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토광묘는 매장 부분이 지하에 수직으로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시신을 누여 묻는 수혈식 매장법(竪穴式埋葬法)을 말한다.

크기를 보아 단장(單葬) 또는 부부를 합장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때로는 목곽을 설치하기도 하고, 그 위에 봉토를 덮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부장품으로는 청동으로 된 칼창·방울과 함께 철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옹관묘의 크기는 신전장이나 굴장 또는 이차장이 모두 가능할 수 있도록 다양하다. 그리고 그 방향은 동향·동남향 또는 동북향으로 놓여 있으며, 부장품으로는 빈약하나마 청동기와 철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선사시대의 매장법 형식은 본격적인 철기문화와 농경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에는 거대한 규모를 특징으로 하는 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두향(頭向)도 동쪽에서 북쪽으로 바뀌고 있음을 고구려와 백제의 분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석총과 봉토분(封土墳)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본래의 분묘형식은 시베리아와 연결되는 적석총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그 형식으로 보아 석관묘의 변형으로도 보이고 있다.

그 축을 동서로 하여 관대 위에 목관을 놓고 단을 만들며 돌을 쌓은 수혈식이다. 그러나 낙랑을 통하여 중국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한대(漢代)의 봉토분의 영향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적석총 계통의 대표적인 분묘인 장군총(將軍塚)은 보다 발달된 양식인 계단식으로, 현실 안에는 두개의 관대가 평행으로 있고 현실 앞에는 연도가 있는 횡혈식(橫穴式)이다.

그러나 5세기 경부터는 적석총 대신에 봉토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구조는 봉토를 덮은 횡혈식 석실묘로서, 현실에는 관대를 설치하고, 벽에는 때때로 중국의 벽화고분과 연결되는 벽화를 그렸다.

관대는 앞의 것과는 달리 모두 남북을 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식 북침남향(北枕南向)의 영향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밖에 영산강 하류 지방에서 발견되는 옹관묘는 선사시대의 묘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나, 시신의 머리를 북쪽과 서쪽으로 두어 선사시대의 것과 구별되고 있다.

신라와 가야의 매장법은 적석목곽분·수혈식석곽묘·횡혈식석실묘로 구분할 수 있다. 적석목곽분은 지하에 목곽을 넣고 냇돌로 쌓은 다음 봉토를 씌운 것으로, 단장을 원칙으로 하고 관을 사용하여 동침으로 처리하였다.

수혈식석곽묘는 재래의 석관묘를 확대한 것으로 보이며, 가장 많이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수혈식인 데 비하여 횡혈식석실묘는 고구려와 백제의 것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고 본다.

이러한 형식은 7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내부구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왕릉으로 전하여지는 작은 규모의 봉토분도 많이 남아 있다. 그 특색은 봉토 주위에 호석(護石)을 두른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봉토분은 그전의 것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곳에 단독으로 위치하여 있다. 그것은 혹시 중국으로부터 영향받은 음양오행사상이나 십이지사상 또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한 장례가 고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러한 추측은 당시 당나라와의 문화적 관계를 고려하여 볼 때 그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통일 전부터 공인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법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교식 화장법은 우선 시신을 화장한 다음 이차적으로 그 남은 뼈를 처리하는 이차장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한 증거물은 골호(骨壺)나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승려의 사리를 모신 불탑이나 부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는 왕가나 일부귀족 그리고 승려들간에나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왕릉의 경우 신라 왕릉의 위치나 양식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그 위치는 풍수지리사상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명당자리에 있어, 장례에서 풍수지리사상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의 모든 분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분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 귀족이나 권세가의 것으로 보이는 석실봉토분도 알려지고 있는데, 석실벽에는 사신도(四神圖)나 십이지신상을 그려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자가례 朱子家禮≫의 수입과 함께 본격적인 유교식 장례에 의하여 회곽봉토분(灰槨封土墳)으로 변한 것 같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대부분 토광묘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토광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백성들간에 그대로 행하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하여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한 유교식 장례가 지배적이었다.

유교식 장례는 대체로 초혼(招魂)·수시(收屍)·습렴(襲斂)·장지(葬地)·장일(葬日)의 선택과 지석(誌石) 준비를 거쳐 토광에 관을 넣고 회곽을 만들어 봉토분을 만드는 절차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향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두되, 봉토분 자체를 인공적인 명당자리의 형국으로 꾸며 머리가 향하는 곳을 관념적으로 북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12년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동묘지나 화장장이 설치되면서부터 풍수지리설에 의하지 않고 단순히 간단한 유교식 장례에 따라 봉분만을 만들고 있으며, 화장시설에 의하여 남은 뼈를 가루로 만들어 산이나 물에 산골(散骨)하는 장례가 성행하고 있다.

한편 1960년대 이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경우 공동묘지와 비슷한 공원묘지에 유교식 장례에 따라서 인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신은 상여가 아니라 영구차로 운반하며, 매장절차만 유교식 장례에 의할 뿐, 이에 따르는 그 밖의 상례는 기독교나 불교식을 따르기도 한다. 반면 시골에서는 아직도 선영(先瑩, 先山)에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자리를 골라 유교식 장례를 행하고 있다.

〔변화 및 전망〕

이상의 분묘구조를 통해서 살펴본 장례는 대체로 중국문화의 영향과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화장법에 의하여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먼저 중국문화의 영향은 앞으로 더욱 세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나, 종래의 생사관(生死觀)에 대한 변화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는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분리시켜 다른 세계에서만 머물도록 조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문화 또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죽음을 숭고한 것으로 인식하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과의 관계를 생전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삶의 세계에서도 죽은 사람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조상숭배사상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종래 분묘의 구조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근대적인 화장법에 의하여 바뀌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장은 물론 경제적인 문제에 의하여 성행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죽은 사람의 육체에 대한 관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유교적 생사관에서는 죽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중요시되는 데 반하여, 최근에는 육체보다는 정신만을 중요시하는 데에서 화장이 성행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우리의 사고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온 불교의 생사관에 근거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그와 함께 기독교적인 또는 서양문화적인 생사관의 영향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죽음보다는 현실적인 삶을 더욱 중요시하여 살아가는 육체, 죽어가는 정신을 강조하는 사상적 배경에 의한 변화로 해석된다. →상례(喪禮)